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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심포니 24년 8월 31일 - 스트라빈스키, 페트루슈카

오케스트라

by 클래식 카테고리 2024. 9. 1. 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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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을 만드는 것은 지휘자와 연주자만이 아닐 것이다. 결국 행정도 관여할 수 밖에 없다. 특히나 피아노 협주곡은 협연자를 누구로 선택하느냐, 그리고 그 협연자의 컨디션을 어떻게 백업해 주느냐에 따라 연주가 달라질 것이다.

상임지휘자가 다른 나라에서 다른 오케스트라를 지휘할 때, 그를 대체할 그 연주를 가장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 지휘자를 고르는 것은 전적으로 행정의 몫일 것이다.
지난번 국립심포니의 연주는 성공적이었다. 얀 포글러의 첼로 연주는 정말 훌륭했고, 지휘자도 탁월했다.

이번 연주는... 1부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은 절반의 실패, 2부 페트르슈카는 성공적이었다.

1부가 절반이 실패라 말하는 이유는, 심포니는 잘 했으나, 피아노 협연자의 연주가 너무 생소했기 때문이다. 도입부의 빠르고 힘찬 연주는 생소해도 너무 생소했다. 불곰 한 마리가 등장하는 연주. 이러한 연주는 3악장까지 계속 이어졌다. 몇 번의 미스터치를 나는 신경쓰지 않는다. 또한 음악의 표현이 연주자의 몫에 달려 있음을 인정한다. 라흐마니노프가 직접 연주한 앨범과의 차이를 굳이 언급하지는 않겠다. 연주자가 꼭두각시는 아니니,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고 그것이 형이상학적 음악 언어로 우리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보여준다면 성공한 연주이다. 그 도입부의 빠르고 힘찬 연주가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과 과연 어울리는 것일까?

스토리적으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을 구성하자면, 1악장은 무기력에 있는 우울증에 끊임없이 스스로 구원의 손길을 내밀고, 일어서지 못하는 무기력이 반복되면서, 우울증 환자들만 볼 수 있는 무기력 속의 찬란함이 계속 드러나다 마침내 피어나야 한다. 2악장은 그런 무기력을 벗어나 스스로를 돌아보며, 자신의 내면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말하는 악장이다. 음악가의 감수성이 일반인의 감수성이 되도록 하려면 표현이 뭉툭해서도 안 되고, 단절감이 느껴져서도 안 된다. 연주자의 자기 연민이 승화된 감수성이 드러나도록 연주해야 한다. 3악장은 마침내 환희 속에서 희망과 힘을 드러내고 다양한 감정의 표현을 자신감 있게 드러내야 한다. 내가 아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의 구조는 이런 구조를 갖고 있고, 그 범위 내에서 연주자의 표현력이 허용된다.

그러니 이번 연주의 피아니스트 알렉산더 코르산티아는 그 범위를 무너뜨렸다. 시작부터 힘이 넘쳤다. 복수심에 불타는 듯한 1악장의 도입부. 마치 불곰 한 마리가 들어오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2악장에서의 감수성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을 들을 때마다 손수건을 준비한다. 그 감수성에 흠뻑 젖다가 눈물을 흘린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내가 감정이 동기화될 그 어떤 실마리도 없었다. 그저, 저 불곰의 감수성을 들어야 하는 피학적인 입장이 되었다고나 할까. 3악장도 이러한 틀을 벗어나지 않았다. 힘찬 3악장에서 불곰이 말발굽 소리를 내며 달리는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좋은 음악의 3요소, 명료성, 밸런스, 표현의 풍성함 이 세 가지 측면에서 볼 때, 명료성은 명료함을 넘어서 너무 딱딱 부러졌다. 음은 명료했으나, 감정은 뭉툭했다. 그래서 음악의 본질인 감정의 명료성 측면에서 피아노 연주자의 연주는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다. 몰입도 안 되고, 감정도 공감하기 어려웠던 것은, 힘과 음의 명료함에만 집중하는 연주자의 연주 태도 때문일 것이다. 밸런스도 너무 집착한 탓인지, 모든 음표의 선율이 다 들리지만, 흐르듯이 지나가야 할 음들이 명료하게 들리면서 현악기와의 흐름이 맞지 않았다. 이것은 특히 2악장에서 심하게 드러나는데, 현악기와 목관악기의 부드러운 음색에 피아노가 화답해야 하는데, 마치 덩치 큰 7살 아이(피아니스트)가 잠을 못 자고 보채고, 엄마(국립심포니)가 포대기로 엎고 달래는 느낌이었다. 국립심포니의 연주는 놀랍게도 그 큰 아이를 충분히 달랠 만큼 넓고 포근한 포대기로 2악장을 달래주었다. 표현의 풍성함에서도 포르티시모, 포르티시시모에 집중할 뿐, 피아노, 피아니시모가 주는 그 가슴 아린 표현이 등장하지 않는다. 나는 비킹구르 올라프손이 연주가 끝나고도 건반에서 손을 떼지 않으며, 현이 남기는 그 여운을 관객에게 선물한 것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그 사라지는 현의 소리에 집중하며 우리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것이 피아니시모, 피아니시시모의 매력이다. 그런 것들이 없었다. 국립심포니가 의전에 실패한 건가? 의전에 실패했다고 저런 연주로 관객을 대한다면, 정말 엉망인 인격이다.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저, 교수여서 학생들에게 자신이 말 했던 "명료한 소리", "협주곡에서 심포니를 뚫고 나오는 파워"를 스스로 실천하다 보니, 망친 것이 아닐까?

참고로, 과학적으로 피아노의 타건은 일정 크기까지는 속도의 영향을 받으며, 그 이후부터는 소리의 크기에 큰 영향을 주지 못 한다. 이는 피아노 구조에서 발생하는 회전 마찰, 지렛대의 원리, 해머의 재질에서 기인하는 현상이다. 그저, 힘으로 밀어 부치면 큰 소리가 날 것이라는 것은 과학을 모르는 연주자의 착각이 만들어낸 환상일 뿐이다. 그렇게 세게 치면 발구르는 소리만 크게 들리고, 피아노의 해머는 망가지며, 회전부분의 부싱은 손상을 입게될 뿐이다. 그리고 90dBA를 넘기는 소리는 음악이 아니라 소음이다. 뚫고 나오려다가 앞자리에 있는 사람에게 큰 소음을 안기게 될 뿐이다. 자고로 기계는 사랑하는 여인 대하듯, 혹은 아기 대하듯 다루어야 한다. 기계는 정직하다. 피아노는 기계이다. 피아니스트의 몸부림은 다 부질없으며, 음악을 망칠 수 있고, 피아노의 마모를 가속시킬 뿐이다. 여기서 Dry 부싱의 마모 수명이 회전 속도에 영향을 받는다고 굳이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피아니스트는 과학을 공부해야 무의미한 연주 액션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 뼈져리게 느꼈다.

연주가 끝난 후 소감은 이러했다. 마치 진라면 순한맛에만 익숙했던 외국인이 불닭볶음면을 처음 맛보고는, "이것이 한식 본고장의 맛인가?"라고 의문을 품은 것 같았다. 생소했다. 내가 알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 2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구소련 조지아 출신이니 내가 이걸 받아들여야 하는지 생각만 들었다.

하지만, 불닭볶음면은 한식이 아니라, 정확히는 삼양라면의 제품일 뿐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음식은 불고기도 있고, 김밥도 있다. 대표음식 육개장에 가까운 것은 신라면이지 붉닭볶음면이 아니다. 그것으로 한식이 무조건 맵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한식을 심각하게 오해하는 것이다. 그렇듯, 나도 그저 불닭볶음면 한 그릇에 놀란 것 같았다. 나는 매운 맛을 좋아하지 않는다. 불닭볶음면은 맛의 명료함도, 맛의 밸런스도, 맛의 풍성함도 없다. 그저 강렬한 매운맛과 기름진 맛과 단맛이 나름 조화를 이루고 있을 뿐, 결코 먹고 싶지 않은 음식이다. 국립심포니는 그 불닭볶음면에 올린 풍성한 차돌박이 구이에 가까웠다.

2부 페트루슈카. 국립심포니가 국립심포니인 이유이다. 이 연주는 금관, 목관, 타악기가 제대로 하지 않으면 발란스가 다 붕괴될 수 밖에 없다. 그런 붕괴는 없었다. 페트루슈카와 발레리나의 이야기를 음악으로 풀어냈듯, 상상력을 불러 일으키는 명료함이 있어었고, 주고 받은 악기간의 호흡도 좋았다. 악기의 대향연 같다고나 할까? 그냥 음악으로 들으면 기이한 음악이지만, 스토리를 충분히 알고 내가 그 음악 속의 이야기로 들어간다면 무척 재미있다. 나는 인형극의 생각하는 인형의 입장에서 이 곡을 들었다. 뒤의 장면이 움직이고, 나는 제 자리 걸음을 하지만 신나게 들판을 걷고 하늘을 보고, 천둥이 치는 상상을 한다. 한숨도 쉬고, 사랑에 빠져서 맹렬히 돌진한다. 그리고 사랑이 받아들여지지 않아도, 실망감은 음악으로 남겨 두고, 나는 또 다른 사랑을 찾기로 했다. 그리고 사랑에 실패한 누군가의 멍청한 이야기를 재미나게 듣기 시작한다. 원래 페트루슈카 스토리와는 다른 전개지만, 나는 음악을 들으며 그런 상상을 음악에 얹었다. 그래야 나의 음악이 되고, 나는 주인공이 되고, 클래식이 만들어 주는 음악적 언어의 매력에 빠져들게 된다. 국립심포니의 연주는 넘치는 입체감, 악기간의 밸런스, 풍성함 등 흠잡을 곳이 없다. 지휘도 좋았다.

하지만 아쉬운 것이 현악기의 가슴 저리는 선율이 없어서 아쉬웠다. 그런데, 이것이 앵콜 곡으로 해소된다. 다른 곡들과 달리 페트루슈카는 현악이 많이 쉬고, 금관과 타악기가 엄청 바쁘다. 앵콜에서는 금관, 타악기는 쉬고, 목관도 거의 쉬며 오로지 현악기로 구성된 "라흐마니노프의 보칼리제"를 연주한다.
보칼리제를 공연장에서는 처음 들어 봤는데, 익숙한 선율에 처음에는 차이코프스키인가 하고 의심했었다. 하나의 악기가 아니라, 심포니가 연주하는 보칼리제는 너무 풍성하고 입체감이 넘치고 좋은 선율이었다. 보칼리제는 연습곡이라고 하는데, 콘코네만으로 연습했던 (나는 성악가는 아니고, 성악을 취미삼아 공부했던 일반인이다.) 나에게는 콘코네에서 느껴 보지 못 했던 너무 아름다운 선율이었다. 사람들이 나를 미성이라고 치켜세워 주니, 보칼리제를 연습해야겠다는 강렬한 욕망이 또 생겼다. (지난 해 국립심포니에서 연주했던 뤼케르트도 내 버킷리스트에 있다.)

전체적으로 평가를 하자면, 1부의 의아함을 2부의 다채로움으로 매꾸며, 2부는 페트루슈카의 부족한 감수성을 앵콜로 깔끔히 채우는 연주회였다.

한화 교향악축제를 들으며 의아스러웠던 것이 하나 있었다. 좋지 않은 피아노 협주곡 연주는 오케스트라와 피아니스트 모두 못 했었는데 누구 탓일지 궁금했었다. 그것이 누구의 탓인지 궁금했었는데, 이 연주회를 통해서 둘 다 못 해서 그렇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부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은 피아니스트는 불곰의 감수성으로 연주했고, 국립심포니는 그것을 감싸주고 덮어주느라 고생했다고나 할까... 마치 9월초에 핀 연꽃에 이상기후 현상으로 서리가 내린 기이한 풍경을 보는 것 같았다. 아름답지만, 걱정스러운... 그리고 진짜 아름다운 연꽃은 보지 못 하는 그런 이상한 연주의 책임은 피아니스트 알렉산더 코르산티아와 그를 선택한 그 누군가의 몫이다.

올해 국립심포니의 가장 실망스러운 연주였다. 그럼에도 점수를 주라면 나는 80점을 주고 싶다. 2부는 훌륭했고, 앵콜은 이를 만회하기에 충분했다. 국립심포니라는 전교 우등생의 어쩌다 사람 잘못 만나 인생 꼬일까 걱정했으나, 바로 잡은 모습을 봤다고나 할까.
"나 밖에 수습할 사람이 없더라고... 나도 힘들었어. 걱정 마~ 더 이상 안 볼 거야."
이런 말 하는 멋진 우등생 아들을 두는 느낌...

그래서 역설적으로 국립심포니는 보증수표다. 만회할 줄 아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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