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슈만은 조울증 환자였고, 애정결핍, 망상증, 경계성 성격장애, 연극성 성격장애도 있었던 것 같다. 클라라는 최대한 뒤에 조연처럼 있으려 했고 슈만을 돋보이게 함으로 존재감을 드러내려 했지만, 결국 이 곡을 초연하게 된다. 클라라와 슈만의 관계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있다. 그리고 지금부터 내가 하는 이야기는 클라라에 의해 세상에 알려진 것과 다른 이야기일 지도 모르겠다. 나의 문학적 상상이 더해진 것이니, 나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당신이 옳고 내가 틀렸다.
클라라에 대한 슈만의 감정은 아내에 대해 느낀 감정이 아니었을 것이라 본다. 절대적으로 깨끗하고 정제되고 아름다운 여성에게, 격정적이고 결핍과 우울에 시달리는 남성이 느끼는 감정은 혐오에 가까웠을 수 밖에 없다. 이 혐오는 다다르지 못한 좌절감의 또 다른 표현이다.
슈만은 자신이 다다를 수 없는 곳에 클라라가 있으니, 자신도 클라라가 닿을 수 없는 곳에 있어야 했다. 가난한 천재가 부잣집의 예쁘고 정갈한 여자를 대하는 가장 흔한 방법은 "니가 세상을 알아? 니가 예술을 알아?"였을 것이다.
슈만은 고고한 클라라의 정신세계를 찢어버리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니 조증 상태에서 작곡한 이 곡은 클라라가 연주하기 어렵고, 이해하기 어려운 고도의 예술적 경지에 이르게 하고 싶었을 지도 모른다. 오케스트라 부분은 클라라가 쓰게 하고, 자신은 피아노 부분을 썼을 가능성이높다. 실제 슈만은 오케스트라 작곡을 잘 못 했다고 한다.
슈만은 클라라가 이 피아노 협주곡을 엉망으로 연주하는 것을 보고 싶었을 것이다. 속으로 '역시 너의 피아노는 수준이 낮아.'라고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그래서 슈만의 피아노 협주곡 초연을 클라라에게 맡겼을 지도 모르겠다. 오케스트라와 발란스를 맞추면, 슈만은 '역시 니가 피아노를 쳐 봤자지... 발란스가 정답이 아니야!'라고 속으로 클라라의 연주를 깔아 내렸을 것이다. 내가 슈만에 빙의했다면 그런 마음으로 가득했을 것 같다. 슈만에게 클라라는 단 한 번도 사랑이었던 적이 없었을 것이다. 나에게 피해의식을 자극하는 여자를 사랑한다니... 슈만같은 사람에게는 있을 수 없다. 그러니 클라라를 옆에 두고도 그 방탕한 생활에 동성애자라 커밍아웃까지 했던 것이다. 슈만은 결국 매독으로 죽는다.
슈만에게 사랑은 음악 뿐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중에 피아노 뿐이었을 것이고... '감히 클라라 따위가 그런 피아노를 치다니.. 웃기지도 않아.'
우울증에 대해서 누가 물어 본다면,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찬란한 햇빛, 파란 하늘, 선선한 바람, 아름다운 선율, 아이들의 밝은 웃음 소리, 꽃향기가 어디선가 가까이 실존하지만, 내가 있는 곳은 지옥. 내가 느낄 수 없는 것들이다. 마치, 내 영혼에 얇은 막이 쳐진 듯, 나는 그것을 느낄 수 없는 상태. 보이고 들리고 냄새도 나지만 난 그것을 느낄 수 없고 내 것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 나는 모든 아름다운 것들로부터 격리되어 있는 상태. 그래서 죽음에 이르러야만 이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것 같은 상태. 이 질긴 투명한 막은 아름다운 것은 못 느끼게 하지만, 사람들이 찌르는 송곳의 예리함은 그대로 전달되고, 그대로 내 몸에 상처를 내고 피를 낸다. 하지만 내 몸은 내가 뱉은 칙칙한 수분과 내 피부에 묻어 있는 세균과 곰팡이로 서서히 썩어가는 그런 상태가 우울증이다."
조증 상태는, 아마도 어느 순간 그 막이 사라지고 모든 것을 느낄 수 있는 상태가 되어, 그동안 광적인 갈망이 해방되는 순간일 것이다. 그러니 이 상태에서는 그 예술가의 모든 것이 뿜어져 나오는 순간이 될 수 밖에 없다. 어두울 때는 끝없이 어둡고, 밝을 때는 끝없이 밝으며, 행복과 고통, 죽음과 삶을 격렬하게 표현하고 싶을 것이다. 그 엄청난 해방감이 슈만의 음악에는 드러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슈만 피아노 협주곡은 맑음은 더욱 맑게, 힘은 더욱 힘있게, 연약함은 더욱 연약하게, 부드러움은 더욱 부드럽게, 어두움은 더욱 어둡게... 그리고 오케스트라를 씹어 먹을 듯한 연주도 보여줘야 한다. 서로 밸런스를 맞추는 것은 슈만답지 않다. 그 깨진 밸런스가 슈만이 의도한 것이라면, 그 속에서 우울감의 해방, 삶의 해방, 모든 조화로운 것을 깨어 버리는 창조가 표현되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어두움을 모르는 사람과는 밝음을 논할 수 없다. 좋은 LED TV를 고르는 기준은 어둠이 얼마나 짙게 표현되느냐이다. 그렇듯 짙은 어둠만이 빛을 더욱 빛내줄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은 어둠을 싫어한다. 그런 사람에게 슈만의 곡은 그저 클라라를 사랑한 서정적인 곡으로 받아들여질 지도 모르겠다. 물론 슈만의 곡을 그렇게 받아들여도 이상할 것은 하나 없다. 클래식에 정답은 없고 슈만의 피아노 협주곡은 충분히 아름다우니까. 나는 이 글을 쓰는 과정에서 거의 일주일 가까이 슈만의 피아노 협주곡을 매일 3시간 이상씩 들었는데, 임윤찬의 연주에서 눈물을 쏟은 경험이 있었다. 맑은 가을 하늘 탓도 있긴 하다.
어떤 곡이든 연주자의 철학, 인생을 바라보는 관점을 선율에 녹여낼 수 있다. 그리고 슈만의 곡은 그 녹여낼 수 있는 범위가 다채롭다.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관객들의 입장도 다채로워서 가장 예술다운 포지션을 차지한다. 작곡가의 곡이 연주자의 손에서 다른 곡이 되고, 다시 관객의 귀에서 다른 곡이 되어 버리는 것이 클래식의 정석이라면 슈만의 피아노 협주곡은 그런 클래식의 정석인 셈이다.
다만 나는 광기에 젖은 조증 환자같은 슈만의 피아노 협주곡 연주를 들어 보고 싶다. 조증 환자에게는 흔히 있을 법한, 우울증 상태에 대한 공포, 우울증 상태의 자신에 대한 한없는 연민과 위로 등도 선율로 표현한 것을 들어 보고 싶다.
그래서 나의 슈만의 피아노 협주곡 연주자에 대한 해석은 슈만의 깊고 어두운 몸부림을 잘 표현했는지에 중점을 두고자 한다.
임윤찬, 조성진, 손민수, 그리고 아내의 죽음 이후 우울증을 겪었던(하지만 아내를 너무나도 사랑한 것은 슈만과 다르다.) Pogorelich(포고렐리치)의 연주의 감상의 차이를 1악장만 비교해 설명하고자 한다.
임윤찬의 거의 모든 연주는 듣다보면 시공간이 확대되는 느낌이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고, 하늘은 높고, 땅은 깊어지는 느낌. 24평의 작은 집이 서른평이 되는 느낌이다. 이 느낌이 어디에서 시작되는 것인지 알 길이 없다. 하지만 분명히 임윤찬의 연주는 그런 느낌을 준다. 매우 밝고 힘이 넘치며, 명료하다. 어둠도 두텁고 선명하다. 명료해서 복잡함은 없다. 몸부림은 느껴지지 않는다. 헬스를 한 클라라의 연주같다. 힘도 있고, 운동을 해서 뭔가 선명한 복근이 보이는 건강미가 넘치지만 사회적 규범을 벗어나지 않을 클라라 같다.
조성진의 연주는 매번 느끼지만, 차디차다. 따뜻한 연주를 해도 가을 난방을 떼지 않은 채 이불 속에서 느낄 법한 딱 좋은 따뜻하고 포근함이 느껴진다. 깔끔하지만 느낌이 없다고나 할까. 그런데 슈만의 피아노 협주곡은 약간 예외였다. 약간의 광기가 보인다. 이는 2악장이나 3악장에서 특히 도드라졌다. 1악장은 초반부터 조성진다운 느낌이 든다. 고요하고 맑다. 회색에 가까운 연주같다. 우울증 상태같다. 슈만에게 괴로움을 당해서 약간 어둡지만, 여전히 정갈한 클라라 같다.
https://youtu.be/x--Ypy9Thu4?si=xfclB08fkCY1XsDy
손민수의 연주.
오보에의 연주 이후 이어지는 슬픈 연주. 점잖은 남자의 세레나데에 가까운 연주가 펼쳐진다. 사랑을 고백한 후 사랑을 이루지 못한 남자의 떠나는 뒷모습 같다. 잔잔하기 그지 없다. 어쩌다 격정적이긴 하지만, 그 또한 손민수의 수트처럼 정갈하다. 그의 연주만 들어 보면, 슈만이 클라라에 대해 미안함과 사랑을 모두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클라라가 연주했다면 이런 식이 아니었을까. 격정적인 슈만을 비웃는 듯한 정갈함이다. 손민수의 연주는 언제나 정갈해서 멋있다. 오케스트라와의 발란스가 맞아 떨어지는 정석적인 연주를 보여준다. 이 정갈함은 클라라의 원형에 확실히 가까울 것 같다.
Pogorelich의 연주.
1악장부터 강렬하게 시작한다. 이토록 강렬한 연주는 없을 지도 모르겠다. 오보에의 선율과 맥을 같이 하지 않는다. 오보에가 클라라라면, 피아노는 슈만이다. 오보에의 선율이 아름답게 끝나자 마자, '씨발 오보에는 아니지. 오보에 주제에'! 닥쳐! 라고 외치는 듯 격렬하게 피아노가 연주를 시작한다. Pogorelich의 연주에서는 피아노가 주선율로 나올 때마다 고통스런 막을 찢은 듯, 막힌 숨이 트인 느낌을 준다. 피아노 선율의 명쾌함이 오케스트라를 뚫고 나오며, "피아노가 모든 악기의 왕"임을 내세운다. 슈만의 오만한 그 모습이 떠오른다.
나는 포고렐리치의 연주가 좋다. 실험적인 듯 보이지만, 슈만의 스토리를 알고 있다면 가장 슈만의 마음에 가장 가까운 연주가 아닐까 싶다. 사실 연상의 여인 (무려 스무살 연상)을 사랑한 포고렐리치가 부럽기도 하고... 인생은 그렇게 살아야지. 아무렴~
자... 과연 피아니스트 김강운은 어떤 연주를 보여줄까? 프라임필을 찢어 버리고, 오케스트라 따위! 하며 피아노가 왕임을 보여주고 싶은 슈만이 될 것인지, 아니면 정갈한 클라라가 되어 오케스트라와 함께 호흡하고 발란스를 맞춰가며 아름다운 선율을 들려줄 것인지...
그 무엇이든 기대된다. 세상에 임윤찬과 조성진만 있으면 너무 따분하고 재미없을 것인데, 그게 아니라는 게 너무 좋다.
38만원짜리 연주회를 가면 물론 좋겠지만, Love in Classic과 차이를 말하라고 하면, 조성진의 유명세와 예술의 전당이라는 공연장 빼고는 난 차이를 잘 모르겠다. 물론 미세한 차이는 있겠지만, 거기서는 커피도 8천원 주고 사 먹어야 한다. 예쁜 옷 차려 입고 연주회에 와서 공연장 앞 광장에서 햇빛을 쬐거나 떨어지는 빗소리를 듣는 것은 서초동이나 산본이나 큰 차이 없다.
모든 예술의 가치는 그것을 대하는 내 마음에 따라 결정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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